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
성벽재건 공사나 약한 자들을 바르게 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분노하는 것도 의를 이루기 위함이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느헤미야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기준에 미달되었기에 그의 분노는 적합함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는 이방 사람들의 비방을 생각하라는 것이며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이방 사람들의 비방을 생각하라는 것은 그들의 그릇된 비방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올바른 비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사람의 뜻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이방사람들의 칭찬 받으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칭찬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 칭찬을 하기도 한다. 특수한 경우이지만,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기도 한다.
예전의 선배에게 들었던 일화이다.
그 당시에는 군에서 종교활동, 즉 주일날에 교회를 가는 날이 있었다. 그런데 졸병들이라 말을 하고 빠지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부대는 진지공사를 한답시고 일손이 모자랐다고 한다.
두 명의 기독교인인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고참들로부터 욕설이 날라 왔다. 얼차려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갔다고 한다. 한 사람은 다음에 가겠다고 하니, 너는 군대를 안다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사람은 고문관이 한 사람은 귀여움을 받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여러 번 반복이 되니 고참들은 교회 가는 사람은 그냥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를 계속 나갔던 사람에게는 고참들이 그의 교회생활을 챙겨주었다. 먼저 교회에 가라고 말을 해주었다. 물론 비아냥이 섞인 것이긴 해도 그를 인정했다. 교회에 잘 참석하지 않던 그 사람이 교회에 가겠다고 했을 때 고참들이 싸늘하게 대했다고 한다. 너는 날라리인데 어디를 가고자 하냐고 말이다.
이 일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고문관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언젠가는 인정을 한다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이방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라는 말도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1-24)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바른 비방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비방에 대하여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근거 없는 비난이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비난에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이방 대적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사람들의 기준보다는 하나님의 기준이 더 엄격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보아도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돌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움을 말한다.
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신6:1,2)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기준이 있다는 것은 생소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기준이 없다. 바로 자기 자신이 기준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만을 의식하고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는 기준이 있다. 기준이라는 말은 척도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0-24)
갈등이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갈등, 즉 하나님과 죄악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는 것은 곧 성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완전한 의인이 아니다. 신분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의인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무기력하다는 것은 이러한 마음과 같다.
바울이 갈등하는 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다면 이러한 갈등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가 심각함을 알게 된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20:12,13)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것은 단지 평가 수단으로서 기준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의지할 기준이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위이 상황은 이것은 일종의 무기력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실패를 의미한다. 세상은 나의 것을 대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문제라면 무기력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것이 된다.
조건은 나에 대한 무기력에서 주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앙에서의 기준은 나에게 있지 않다.
신앙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우리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출14:9-11)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적들이 있다. 무기라도 있고 능력이라도 있으면 싸우겠는데 싸울만한 힘도 없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애굽 군대도 아니요 자신들도 아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이다.
느헤미야가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들이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들처럼 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으로 행해야 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2-24)
[표준새번역]골 3:24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단에 대하여 정확히 아는 것은 사단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사람을 정확히 아는 것도 하나님을 알면 사람도 알게 된다.
무엇이든지 기준만 정확하게 알면 다른 것은 쉽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들이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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