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1:6)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라...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1:6)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라는 말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수 도 있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무슨 태권도 1단, 2단을 따는 것 처럼 믿음이 있어야 덕이 있고 덕을 갖춰야 지식을 가지는 그런 식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덕목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절제는 지식 자체에 대한 절제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식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 때 절제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한다.
인내는 ‘참을성 있는, 변치 않는 기다림‘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 인내는 무조건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부터 나온다.
그래서 인내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하는 요소가 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우리는 참는 이유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바로 인내가 되는 것이다.
참고 기다리는 바탕이 되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참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 예전의 러시아의 고문 중의 하나가 땅파기 였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땅만 파내는 것이다. 땅을 파면 그리고 땅을 덮는다. 이것이 고문인 이유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수영선수가 해협을 건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유가 궁금했다. 바다가 차가워서, 아니면 상어의 위협, 아니면 체력적인 문제인가 등을 생각했다.
그 선수가 말했다. 안개가 껴서 목표지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무조건의 인내는 미련한 짓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내는 소망, 즉 목표를 가진다. 이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이처럼 인내는 우리의 끈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두는 것이다.
어떤 선교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확신하고 어떤 선교지로 나갔다. 그곳에서 열매는 거의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나왔다. 그는 1년이 다되어가도 열매가 없자 하나님께 1년이 지나가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부르신 줄을 알겠다고 했다. 기적적으로 1년이 다 되어 가기전에 한 사람이 믿었다.
그 후 선교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지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열매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선교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그 나라로 간다고 했다.
이 처럼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다.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인내에 대한 여러 가지 예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리고성의 방어는 튼튼하였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수6:3-5)
하루에 한 바퀴를 돌라고 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7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움을 하러 나온 것이었는데 하루에 한 바퀴식 도는 것을 되풀이 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한 일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인내가 필요했다.
자신들의 경험이나 세상 누구도 성을 13바퀴 돌고 무너뜨린 적은 없었다. 이 일은 앞으로도 없을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분명히 하나님은 13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면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히 10:36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나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함이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무너져 내렸다.
성이 공격을 받았다면 성벽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무너져야 하지만, 실제로 여리고 성은 안쪽에서 바깥으로 무너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마15:22)
자신의 딸이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 하나가 예수님이 자신이 사는 곳에 오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였다.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메시야의 다른 명칭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잘 아는 여인이 예수님께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의 태도가 여느날 과는 달랐다.
보통 때 같으면 그 여인을 불러서 말씀으로 낫게 하시든지, 아니면 친히 그 집을 방문하실 것 같았는데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15:23)
오히려 제자들이 와서 청할 지경이 되었다.
이것은 여인이 거의 광분할 정도로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마디 하셨는데 뜻 밖의 말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15:24)
그 여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다.
백부장의 종도 고쳐주신 분이시고 7병이어(마15:37)의 기적까지 행하실 분이었는데 심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보다라고 낙심을 할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5)
그는 예수님께 절하며 간구하였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6-28)
예수님은 그를 개 취급 하셨지만, 그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을 자격은 있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야박하게 하셨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이 여인을 돕고 계셨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도우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베드로를 도우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돕고 계신다. 가나안 여인을 도우시듯 우리들을 돕고 계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우리의 인내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을 붙드신 손길이 지금도 우리들을 붙들고 계신다.
결국 가나안 여인이 인내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그를 인내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에 대한 인격의 신뢰가 우리를 인내하게 만든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인내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거절에 낙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2:4,5)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곤란을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였다.
창26: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그는 계속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그곳에서 부유해졌다. 하지만, 그랄에서 부유해졌던 이삭은 그곳 사람들의 시기에 의하여 떠나야 했다. 그것도 우물을 빼앗기고 다른 곳을 떠났다. 계속해서 자신들이 정당하게 팠던 우물을 아무 이유 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우물은 생명줄과 같았다. 그런데 여러 번 빼앗기게 되었다.
창26: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증오, 적대)라 하였으며
이삭은 마지막일 될 수 도 있는 우물을 포기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넓은우물)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에섹, 싯나를 거쳐 르호봇으로 갔다.
이삭은 우물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였다. 그는 인내하였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돌보는 확신을 가졌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 확인 시켜 주셨다.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우물을 계속 양보했다. 그가 양보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삭의 인내와 참음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이삭의 인내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 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26:27,28)
그들은 이삭을 인정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인내는 우리의 끈기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며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우리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여리고성을 돌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13바퀴를 돌았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말도 안되는 우물 강탈을 감내하였다. 결국 사람들은 이삭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였다.
인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게 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들을 강권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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