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8:18-20은 모든 인류가 복음을 받아 들일 마음의 문을 열수 있는 첫 관문이며. 지상에서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
by 100 친 / on Jul 26, 2007 22:29
마28:18-20은 모든 인류가 복음을 받아 들일 마음의 문을 열수 있는 첫 관문이며. 지상에서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이루도록 하나님들께서 친히 참여하시겠다고 하시는 언약으로서의 약정이다. 하나님들의 하나 됨이 첫 창조의 시대를 이루었듯이, 우리들의 믿음과 삶의 의존이 삼위하나님으로 일관 할 때, 주님이 기초하신 재창조 사역은 온전해 진다.
또한 창조시에는 완성된 시, 공간을 인간이 무너뜨리지만, 재창조는 무너진 시,공을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워가며, 유지와 발전은 성령님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로 인하여 충족된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정보를 사도행전에서 획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보다 먼저인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이미 성령님의 폭발적 사건을 위해서 이미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수소문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에서의 성령행전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탄생에 참여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기와 관련된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그런 면에서 성령행전은 누가복음이 제일 성령행전, 사도행전은 제2 성령행전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더불어 사도행전에 있어서도 성령행전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도들의 행적조차도 하나님들의 개입하심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이 없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공동체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사역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에 전무한 공동체의 기도가 여기서 태동했고, 공동체 안에서 핍절한 사람이 없는 첫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 졌으며,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진 언어가 잠시 통일 된 것도 이때이며, 사도의 거침없는 설교로 거대한 죄의 집단이 무너지고 하나님나라에 들어온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 현장이며, 복음에 대한 거부와 순교자를 통하여 선교의 전진기지가 생긴다.
우리는 이 신나는 역사의 진원지가 어디서 왔는가를 찾아야 하는데, 하마터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뻔했다. 이 사건을 사도행전의 자체에서 찾으면 다시 찾아야 하는 시간이 소모된다. 이 모든 출발은 창1장 속에서 찾게 될 때, 다음 이야기는 여유롭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28:18-20절도 가능하지만, 이미 이전에 신약의 주제이신 예수님을 찾게 될 때 그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바로 누가복음에서이다.
누가복음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에서는 인간 족보로 주님의 탄생기사를 증명하며, 마가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사역출발 시점에서 성령님의 임재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탄생 때 마중나온 사람들 모두가 성령님과 직접 관련되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눅1:14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에 그 의미의 근저가 바로 성령님의 임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누가복음에서 성령님의 행진은 다양한 사람, 다양한 사건으로 드러내 보이신다. 그중에서
1:35 마리아
1:41 엘리사벳
1:67 사가랴
2:25-27 시므온
그 후 예수님게서 세례 받으실 때, 시험 받으실 때에, 성령님께서 개입한 명백한 증거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이것이 없으면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성령임재의 사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실, 성령님의 임재 사건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들이 처음부터 역사에 개입한 차원을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그러난 단계적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창세기에서는 아주 조용하게, 예수님 시대에 조금 드러내시고, 사도시대에 폭발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시대에는 완전히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신다. 그러니 다시금 따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간구는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뜻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며, 필요하다면 충만에 대한 간구가 필요할 것이다.
복음에 대한 사명감과 결단과 동시에 성령님은 그 순간에 임재하시며, 우리가 행동할 때에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믿음의 출발과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함께 달리시는 것이다.
서로가 미루지 않으시고, 앞장서시며, 먼저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그분들의 공동체의 전형을 우리들의 기도속에서 발견하고 본 받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연합의 기도이다. 목표가 동일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목표가 동일해 질때 비로서 역사의 현장의 생성되는 것이다.
때로는 마리아처럼,때로는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 처럼 그 임재의 현장과 충만의 현장을 경험하며, 세례요한 처럼, 예수님 처럼, 사역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면서 계속 달려야 할 것이다.
또한 창조시에는 완성된 시, 공간을 인간이 무너뜨리지만, 재창조는 무너진 시,공을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워가며, 유지와 발전은 성령님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로 인하여 충족된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정보를 사도행전에서 획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보다 먼저인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이미 성령님의 폭발적 사건을 위해서 이미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수소문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에서의 성령행전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탄생에 참여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기와 관련된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그런 면에서 성령행전은 누가복음이 제일 성령행전, 사도행전은 제2 성령행전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더불어 사도행전에 있어서도 성령행전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도들의 행적조차도 하나님들의 개입하심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이 없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공동체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사역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에 전무한 공동체의 기도가 여기서 태동했고, 공동체 안에서 핍절한 사람이 없는 첫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 졌으며,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진 언어가 잠시 통일 된 것도 이때이며, 사도의 거침없는 설교로 거대한 죄의 집단이 무너지고 하나님나라에 들어온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 현장이며, 복음에 대한 거부와 순교자를 통하여 선교의 전진기지가 생긴다.
우리는 이 신나는 역사의 진원지가 어디서 왔는가를 찾아야 하는데, 하마터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뻔했다. 이 사건을 사도행전의 자체에서 찾으면 다시 찾아야 하는 시간이 소모된다. 이 모든 출발은 창1장 속에서 찾게 될 때, 다음 이야기는 여유롭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28:18-20절도 가능하지만, 이미 이전에 신약의 주제이신 예수님을 찾게 될 때 그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바로 누가복음에서이다.
누가복음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에서는 인간 족보로 주님의 탄생기사를 증명하며, 마가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사역출발 시점에서 성령님의 임재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탄생 때 마중나온 사람들 모두가 성령님과 직접 관련되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눅1:14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에 그 의미의 근저가 바로 성령님의 임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누가복음에서 성령님의 행진은 다양한 사람, 다양한 사건으로 드러내 보이신다. 그중에서
1:35 마리아
1:41 엘리사벳
1:67 사가랴
2:25-27 시므온
그 후 예수님게서 세례 받으실 때, 시험 받으실 때에, 성령님께서 개입한 명백한 증거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이것이 없으면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성령임재의 사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실, 성령님의 임재 사건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들이 처음부터 역사에 개입한 차원을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그러난 단계적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창세기에서는 아주 조용하게, 예수님 시대에 조금 드러내시고, 사도시대에 폭발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시대에는 완전히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신다. 그러니 다시금 따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간구는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뜻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며, 필요하다면 충만에 대한 간구가 필요할 것이다.
복음에 대한 사명감과 결단과 동시에 성령님은 그 순간에 임재하시며, 우리가 행동할 때에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믿음의 출발과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함께 달리시는 것이다.
서로가 미루지 않으시고, 앞장서시며, 먼저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그분들의 공동체의 전형을 우리들의 기도속에서 발견하고 본 받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연합의 기도이다. 목표가 동일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목표가 동일해 질때 비로서 역사의 현장의 생성되는 것이다.
때로는 마리아처럼,때로는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 처럼 그 임재의 현장과 충만의 현장을 경험하며, 세례요한 처럼, 예수님 처럼, 사역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면서 계속 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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