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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by coixn  /  on Sep 05, 2010 22:16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찬양한다, 혹은 영광을 돌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이다. 신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덜 귀하다는 표현을 할 수 없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한 분 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고 사랑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신의 성품 혹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우애,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혹은 더하라고 한다. 이것은 순차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고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형제우애는 제한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범위가 정해져있을 뿐 아니라 사랑을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형제우애 다음의 사랑은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4,45)

원수를 사랑함에 있어서 (물론 그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받을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함을 목적으로 한다.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 결과가 금방 드러나면 좋겠지만, 결과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기도로 유명한 조지 뮬러가 살아 있는 동안 응답을 받지 못한 기도가 있었다. 몇 십년을 친구의 구원 위해서 기도했지만, 친구에 대한 기도는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응답되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을 앞두시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6-8)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계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두라고 하신다.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가 결과에 대하여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관계할 것이 없다. 대신 우리는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말이다.

 

무조건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역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 때 할 수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3,14)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이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이었다.

바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중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라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기에 사랑을 하기 쉬울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사랑을 하기 더 어렵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본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신다. 우리의 완악함과 대적함을 그대로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구보다도 우리들을 잘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1-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랑과 비슷한 용서라는 것이 있다.

용서는 어렵다. 용서는 나를 죽이는 고통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18:20,21)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17:4)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겠는지를 물었다. 그는 아마도 칭찬을 기대한 것 같다. 그 당시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1:3;2:1;Jome 86b).

하지만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 즉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구약의 다윗과 사울을 만날 수 있다. 사울은 왕이었고, 다윗은 왕이 될 자였다. 다윗은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그는 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고 그를 죽일려고 하였다. 다윗도 사울을 죽일려고 했으면 그의 고난은 좀 더 빨리 끝났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침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다윗은 이미 엔게디에서 사울을 죽일 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살려 주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24:6)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 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24:12)

 

하나님께 결과를 맡겼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 지는 몰랐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놓아주었다.

사울은 다시금 다윗을 잡으러 나왔다.

십 황무지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 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삼상26:8-11)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했다.

그는 사울을 살리고자 했다. 사울에 대한 운명을 여호와께 맡기신 것이다.

다윗은 이 일 후에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27:1)

다윗의 이러한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다윗은 왕이 되었다. 다윗은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고 하나님의 주권을 끝까지 믿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두명이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39-43)

 

십자가에 달릴 정도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 때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였다. 그리스도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간혹 하는 착각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거나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야 하는 의무도 사랑해야 하는 의무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우리를 심판해야 하는 의무는 있다.

사랑은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신비중의 하나이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 가리라(34:14,15)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지만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마치 엘리야가 폭풍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중에 그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강도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선입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눈으로 뵙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를 사랑했다. 예수님의 사랑함에 있어서 환경과 형편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영원토록 변화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0:11-13)

평안을 빌었는데 그 평안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빈 말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도우면서, 혹은 전도를 하면서 복을 빌었는데 그 복을 거부하면 자기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랑을 거부하면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손해가 보는 일은 없다. 대신 순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쓰릴 때도 있겠지만, 후에 보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결론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무조건 적인 사랑을 한다면 우리에게 헌신과 희생만 강조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풍성해 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통하여 그가 회개할 지 하나님께 돌아올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사랑을 아는 자들이며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 갚은 것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8)

Me2day Yo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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