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26:14,15)
다메섹으로 간 바울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울을 먼저 찾았다. 사실 바울이 예수님을 먼저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찾을 가능성은 없다.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이 나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찾으신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3,14)
바울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원하던 인생은 아니었다. 자신의 계획은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표준새번역]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겠느냐!
[현대인의성경]사람의 길은 여호와께서 결정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기 길을 알 수 있겠는가?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28:16-19)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축복권을 가로챘다. 그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 에서를 피하여 삼촌 라반에게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스라는 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게 되었다.
야곱이 필요한 것은 삼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출3:1-3)
양 무리를 친지도 40년이 흘렀다.
애굽 왕자의 신분으로 사람을 죽이고 이곳으로 온지도 40년이 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주셨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셨다. 우리의 인생계획에 예수님은 없었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펼치셨을 때 우리의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아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지 우리가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눅10:21,22)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바르게 알고 있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예수님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혹은 너의 취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꼭 필요한 존재인가라고 묻는다면 나 스스로에게 담대하게 대답을 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나는 예수님이 꼭 필요한 존재인가? 라면 묻는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바로 나이다. 이것은 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내가 깨닫던지 깨닫지 못하던지 내가 인정을 하던 하지 않던 사실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일 더하기 일이 이인 것처럼 이것은 변치 않은 진리이다.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나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 역시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교회역시 먹고 사는 직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직장은 직장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는 직장이다.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삶은 멸망으로 서서히 가고 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서서히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멸망이 시작되었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서 지워진 상태라면 나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나는 예수님께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찾아야 할까 예수님이 나를 찾으셔야 할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목마른 자는 예수님인가? 아니면 나인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내가 먼저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야 한다.
사람들의 관계,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관계는 연약한 자가 강한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으면 강한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살아 남는 자가 강하냐 강한 자가 살아남느냐라는 말 장난도 있지만, 지향하는 점이 강한자임은 분명하다.
아쉬운 자가 도움을 받을 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접대도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하는 것이지 있는자가 없는 자에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예수님을 찾는 것 보다 예수님이 더 찾고 계시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는가?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2:21-25)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하여, 서로의 기쁨을 위하여 창조되었는데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반항하는 꼴이 되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20:9)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없다. 누구도 내 죄를 스스로 깨끗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0-14)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우리를 대우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대우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으로서 우리들을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시22:30,31)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야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셔야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예수님을 아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0-25)
세상과 너희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다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삭개오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이전에 예수님이 우리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바라보기 이전에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드리기 이전에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목숨을 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계획한 인생이 아니다. 또한 내가 계획한다고 되는 인생도 아니다.
이것은 은혜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에게 은혜는 주어졌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4:14,15)
안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여러분들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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