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이방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벽재건 공사는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흉년으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이 더욱 가난해지게 되었고 일부 부자들은 그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느5: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도 사람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일에 관심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사람을 위하는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보다 사람 아닌 것에 관심이 많다. 일중독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일에 중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돈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을 묻는 다면 마땅히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선택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돈과 사람 중에 어떤 것은 선택하실 것인지를 묻는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하실 것이다.
어떤 회사의 사장은 사람보다 일에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였다.
‘조만간 당신은 일이라는 공은 고무공이어서 떨어뜨리더라도 바로 튀어 오른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4개의 공들(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나))은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중 하나라도 떨어뜨리게 되면 떨어진 공들은 닳고, 상처입고, 긁히고, 깨지고, 흩어져 버려 다시는 전과 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당신의 인생에서 이 5개의 공들의 균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성벽재건과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문제이다.
둘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를 판단하신다. 금식의 경우만 보더라도 금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금식을 하는 가운데서 물을 먹었느니, 몇 일을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문제는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3-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 대하여 좋지 않게 대한다면 자신이 금식을 하고 있는지 단식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 그러하듯이 금식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요시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난한 자의 억울함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심각하게 반응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에 비하여 약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힘의 유무에 따라서 대하는 것이 달라지면 안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칙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통하지 않는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19:15)
하나님은 공동체가 사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7-11)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멸시와 핍박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은 섬겨야 하는 대상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자신보다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보다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을 섬기기는 어렵다.
야고보서 2장은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위의 권고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특별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들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것을 하는 자들을 말한다.
나의 본성을 따르는 자들이나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사랑은 느낌 혹은 감정이라고 생각이 되는가, 아니면 행동이라고 생각이 되는가? 사랑은 명사인가? 동사인가?
사랑이 느낌, 혹은 감정이라면, 소위 말하는 필이 와야 사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행동이라면 이것은 의지에 관련이 된 문제이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일단은 해야 한다.
공부를 마음이 내켜서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일종의 의지인 셈이다.
사랑을 느낌으로 보는가? 행동으로 보는가에 대하여 정확히 이것이 답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느낌으로 본다면 사랑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랑을 느낌(감정)으로 생각했다면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는 의인도 아니며 선인도 아니다. 이 사람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느낌을 줄 없다. 예수님은 사랑을 행동이나 의지로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이 마음에 들 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먼저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느낌만 기다리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령도 우리의 느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의지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본성을 거스리는 자들이다. 자신의 느낌은 부자에게 잘 보이고 싶고 가난하고 병든자를 무시하고 피하고 싶지만, 이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처럼 말이다.
가난한자들이든지, 부유한자들인지 공평하게 대우를 해야 한다.
부유한자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다면, 가난한 자들에게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우리들의 행동은 하향평준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향평준화를 이루는 것이다.
가난한자를 무시하는 것처럼 부유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하듯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자들이다. 사람을 대하듯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하듯이 사람을 대하는 자들이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 이전에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재건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일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람 중심의 사람이었다.
이런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
결론적으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28-33)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웃을 반드시 사랑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고 사람들을 돌보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을 해야 한다.
나의 감정에 충실하고 느낌에 충실한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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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2010.08.20 23: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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