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은 자...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행26:6 그러나 그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입니다. 제가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7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저와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독 제게만 죄가 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8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일입니까?
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뜻이 아니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 했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로 부터 온 것이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핍박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은 경쟁상대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 부터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지만, 세상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21:44)
날계란이 돌 위에 떨어질 때 부서지는 쪽은 돌이 아니라 계란이다. 하지만 계란이 계속 부딪치게 돌이 그대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돌이 계란에 부딪치게 된다. 앞엣것을 소극적인 심판이라고 하다면 후자는 적극적인 심판이다.
하나님과 대적하면 대적하는 자가 심판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죄는 창조질서에 반하는 것이다. 창조질서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만물을 섬기고 이웃을 미워하며 하나님을 다스릴려고 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0-23)
하나님을 무시하면 나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심판의 상태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바울이 자신에 대한 핍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비롯되었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예전에 자기도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
바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그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였다. 이것을 자신은 알지 못하고 행한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에 무지한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대로 행했다고 고백한다.
사사기에서 두 번이나 되풀이 하는 말이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였다.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여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결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들을 반복하였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가지를 명령하셨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신12:8)
성경은 자기의 생각대로 행했다가 곤란을 당한 많은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의 생각, 즉 주관대로 행하는 것이 나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대척점에 세웠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에 의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하지만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다. 소경된 자를 불러 신문을 하다가 예수님을 옹호하는 소경의 말에 그들은 발끈하였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9:28,29)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없었다. 단지 자신들의 관습을 어겼을 뿐이었다.
엘리사 시대 때 나아만 장군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왕하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불치병이라고 생각되었던 나병을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가 고칠 수 있다는 계집종의 말에 나아만은 들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냥 말만 했다. 요단강가에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 자신은 요단강에 목욕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러 온 것이었다. 적어도 나병을 고칠려면, 이런 저런 의식을 치뤄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된다고 말을 했다.
만약 나아만이 그대로 돌아갔다면 그는 병을 고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밑에는 현명한 부하들이 있었다.
왕하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옥에 감금하였다.
베드로는 죽게 되었다. 헤롯은 베드로를 유월절이 끝나면 베드로를 자신의 인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고자 하였다. 혹자는 베드로의 처형을 생각하기도 한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12:12-15)
헤롯이 베드로를 이용하려던 전날 밤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베드로는 풀려나게 되었다. 그 자신도 환상으로 생각될 정도로 급격하게 일은 이루어 졌다.
베드로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을 처음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매어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움직이신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성경을 볼 때 “거리두기“라는 것이 있다. 성경을 성경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대하기 보다는 옛 선입관이나 나의 생각으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도 나의 형편에 따라 판단하기 쉽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나의 기분이 좋아졌거나 나의 형편이 나아졌다라고 생각하면 은혜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삭개오가 은혜 받았을 때 그는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다.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환도뼈가 위골 되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었을 거의 죽은 자처럼 되었다.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가 나를 만지며 나로 강건케 하여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단10:17-19)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고 평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성령의 음성도 하나님의 말씀위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주관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의 판단이나 주관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 쉽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여전히 증명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을 품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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