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아그립바와 그 일행들 ...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아그립바와 그 일행들 앞에서 바울은 또 다시 변론을 하게 되었다.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유대인들의 핍박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 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행26:6,7)
바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핍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로 인한 핍박임을 알았다. 그 무지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바울은 바로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나이까라는 질문과 같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던,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믿지 못하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경계는 명확하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갈리는 것과 같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눈뜨게 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예수님이 그 사실에 대하여 숨긴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밝히셨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요10:24,25)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10:37,38)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기에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지금의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체험으로 도움을 주시기는 하시지만, 그 체험이 이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에 의하여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자신의 체험을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는 말처럼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하나님이시면 나에게 다른 능력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이미 말씀이 주어졌다라고 하실 것이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무시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반항 등을 들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의 예는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히스기야 시대의 강국인 앗수르가 그러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유다마저 위협했다.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에 행한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왕하19:10,11)
앗수르는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왕하19:15-18)
앗수르는 신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조각품을 무너뜨렸을 뿐임을 히스기야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으며 하나님으로 경배를 받으실 이도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무지와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왕하19:22)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25-28)
모든 것의 주관자는 힘을 가진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앗수르는 알아야 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겸손할 수 밖에 없다. 그 힘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5)
하지만 교만의 대가는 멸망이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안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19:35-37)
그들의 교만의 결과는 그들의 처참한 멸망이었다. 그리고 앗수르의 왕인 산헤립은 자신의 신 앞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그 무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항께 반항하는 죄로 나타난다.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행13:26,27)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증거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께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대할 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세상적인 판단을 하게 만든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1-4)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사람을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머리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겸손히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항상 보호하심을 아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항상 하나님께 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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