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느2:13)
예루살렘으로 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로 했다.
느헤미야는 동생으로 부터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하여 들었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고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반대가 있음을 예상하고 예루살렘의 상황에 대하여서도 알아보았다.
예루살렘은 예상대로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에 탔다.
말 그대로 폐허이다.
느헤미야가 본 것은 다 무너진 예루살렘이다.
그는 상황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피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문제 파악을 통하여 어떠한 해결책을 찾는다.
오답노트를 작성한다거나, 자신의 연약한 점을 찾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인간이 인간을 파악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을 했지만,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쇼펜하우어의 물음은 유명하다.
그 철학자가 공원에서 밤늦도록 앉아있었다.
공원의 경비원이 폐장시간이 되어 순찰을 하다가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 철학자는 경비원에게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 그것인데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은 끊임없이 지금도 하고 있는 질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가야 한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43:7)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사43:21,22)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베드로와 이사야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알게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1-13)
이것이 신앙과 관계된 문제라면 나의 문제점을 안다고 한들 나로 부터 해결책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깨닫지도 못할 뿐 더러 깨달았다고 한들 이것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에 빗대어 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율법의 기본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기 때문이며, 율법은 어느 것 하나라도 범하면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3:10-12)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어떤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무엇을 행하지 못함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기본에 속하는 것이다.
이 기본은 우리들의 시작이자 우리들의 마지막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 두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6-10)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파괴시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예루살렘처럼 파괴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재건 된 것이다.
느헤미야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파괴된 예루살렘이다.
하지만, 그는 비전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곳 예루살렘에 두신 비전을 보았다.
그는 비전을 보았기에 편안한 궁중의 삶을 마다하고,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이곳으로 왔다. 그것도 모든 것이 보장된 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이곳으로 왔다.
비전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이곳 까지 부르신 것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구경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재건되는 예루살렘을 보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만족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상황을 절망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소망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1,2)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영생이고 그 영생은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있는 곳이 어떠한 곳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만족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상황을 절망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소망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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