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행22:13) 바울은 천부장의 허...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행22:13)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에 자신의 신앙 간증을 한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간증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열심이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는 들었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행동을 보였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다메섹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의 열심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책망하셨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22:7,8)
바울에게 왜 자신을 핍박하는 지를 물었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게으르고 악한 종이었다.
여기서 게으르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게으르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를 당장에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셨다.
바울은 이 때를 회상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3-16)
그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신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사건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알게 하려 함을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사건임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 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5-27)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공동체라는 것은 나의 삶이 공동체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의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바울과 기독교 공동체의 지향점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아나니아를 만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이라는 자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을 하셨다.
사울의 잔악함을 익히 알고 있던 아나니아는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3-16)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나니아는 사울은 심판받아 합당한 자라로 강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앙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제자들이 그러했고,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그러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막10:37-41)
주님의 일을 맡는 것은 낮아짐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을 낮춤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이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는 나를 높이는 것이 주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주님이 높아지는 것이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8,9)
사울이 하나님께 선택되어 왕이 된 것은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나님과 자신은 경쟁상대가 된다.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7-19)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나를 겸손히 낮출 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그는 사울을 만나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선입관으로 바울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바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보라고 말을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4-17)
아나니아가 사울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잣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 대로 사울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시는 그대로 사울을 보았다.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에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대하는 그대로를 대하면 된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과 예수님 밖에 있는 자로 구분이 될 뿐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와 아나니아의 순종으로 예수님께 쓰임을 받게 되었다.
그는 후에 바나바로 부터 도움을 받게 되고 많은 사람으로 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9:26,27)
결론적으로
바울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열심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울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다시금 기회를 허락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한 본 임을 알았다.
그는 아나니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나니아는 그의 선입관으로 바울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로 바울을 만나 세례를 주고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시는 그 관점 그대로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들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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