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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하나님을 믿을 때 잘 못 될 것...

by coixn  /  on Jan 31, 2010 22:21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하나님을 믿을 때 잘 못 될 것을 바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무엇인가가 잘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 사람들이 가끔 간구하는 것이 있다.

바로 형통이다. 형통이라는 것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감”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형통을 바라는 많은 기도들이 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118:2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그리고 역대상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유달리 기도시에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고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대상은 10장까지 인물을 계속이야기 한다. 그런데 대상 4장의 한 인물은 누구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 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9-10)

 

야베스의 기도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낳는 기도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심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가 형통하고 잘되고 그러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지거나, 손이 짧아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열심이 없거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가를 자문해 본다.

물론 심각한 죄를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자체로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 보다는 자기의 기준, 사회의 기준, 사람들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난이 없이 그냥 평안하고 즐거우면 좋으려만, 짧지만,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고난을 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알 수 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1400년 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의 응답을 받았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이것을 출애굽이라고 부른다. 바로는 그들을 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능력 앞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의 이상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14:3,4)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와 애굽 군대,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앞으로는 바다요, 뒤로는 애굽 군대 였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 앞에 계셨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13:21,22)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이 사건은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모든 민족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건너가고자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예수님이셨다.

3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면 헛되이 보내신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무엇을 의도하시는 지는 그들은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예수님이 우리들을 따라오라고 했을 때 어떠한 목표를 제시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은사를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전하고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을 서로에게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빠진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의문은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36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38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과 제자들을 실은 배는 어느 정도 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제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자들 즉 뱃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뱃사람이었지만, 바다에서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

모두들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다. 왜 자신들은 죽게 생겼는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상황에서 조용조용히 혹은 성질을 죽여가며 이야기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자신들의 성격이 나왔을 것이다.

자신들이 알 때 예수님은 목수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던 터라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을 것이다. 혹은 기도로서 물결을 잠잠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는 말과 같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5,6)

 

히브리서 말씀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들은 예수님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떠나지도 않고 내가 예수님을 버리지도 않겠다라는 약속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약속을 한 사람이 있었다.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약속을 예수님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 약속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베드로에게만 하신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능력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베드로를 보시던 그 마음 그대로 지금 우리들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그는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3,4)

 

모든 것이 불평일 수 있고 모든 것이 은혜 일 수 있다.

나의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나의 생각을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싸움은 말씀을 가지고 하는 싸움이다.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지 믿지 않는가의 싸움이다.

실족한다는 것과 그 사람이 어려워 졌다는 것은 말씀에 대하여 회의가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씀에 회의가 생겼다는 것은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죽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을 깨시고 이렇게 행동하셨다.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4:35-41)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서 깨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신다.

예수님의 위기에서 벗어나시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다.

우리들의 방식을 따르기도 하시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방식대로 하신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대로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들의 기도가 모두 응답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광풍을 잠재우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다. 무서운 것은 믿음이 없기에 무서운 것이다.

본래 우리들이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을 돌보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5,6)

 

형통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이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셔야만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고난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증명해 준다.

고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준다.

예수님이 타신 배는 광풍을 만날 수 있지만, 침몰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해 줄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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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2day Yo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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